크리스터 스탠달의 소논문에서 제기된 질문(어떻게 내가 은혜로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가)과 그에 대한 대답으로서의 칭의는 종교개혁시대의 고뇌하는 신앙인의 질문일 뿐이지, 정작 바울이 제기했던 칭의의 본 의미는 아니라고 시작하는 저자의 전개가 짧지만 강력하다.
이 책의 주제와는 무관하게 목회의 현장에서는 '내가 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을 그렇게도 꼭 받아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는 이들을 만난다. 그에 대한 대답이 궁색하다 여겨질때가 있다. 죄인이기에라는 대답은 어떤 때는 공허하다. 저자는 데살로니가 전서를 시작으로 구원의 한 표현인 '칭의'논의를 시작하는데 여기서 나는 15-6년전엔가 IVF-USA의 간사들이었던 릭 리처드슨인지, 지미 롱인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들이 던졌던 질문, '무엇인 문제인가?'로 시작하라는 것이 문뜩 떠올랐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결혼은 대개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결혼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했다. 결혼처럼 인간은 저마다의 이유로 문제를 말할 수 있다고, 그래서 구원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데살로니가전서의 역사의 종말과 심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불행을 현재형으로 말할 수 있는 모든 이에게 '칭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샌더스와 그의 1세기 유대교 이해, 또 새관점(New Perspective)에 대한 논의는 참 적절하다.
로마서 강해를 할 때, 몇몇 교인들로부터 '목사님의 강해는 옛 관점에서 하신 설교네요'라는 말들을 들었다(긍정도, 부정도 아닌 단지 새 관점에 흥미를 느끼고 오랜동안 공부한 이들의 평이었다.) 로마서를 구원과 칭의론의 입장에서 보자면 옛관점과 새관점으로 나뉠 수 있으나 교회와 선교론으로 본다면 나는 둘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갈라디아서에서는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그 분이 성취하신 의로움의 완성이라면 옛 관점의 의로움이 새 관점의 의로움(교회됨과 그 안에 포함될 하나님 나라의 백성됨의 포괄성)과 만나 통합을 이룰 지점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까? 옛 관점을 강력히 지지하는 책에서 오히려 새 관점의 설득력을 발견하게 되는 이 아이러니는 대체 무엇인가?
내가 구입한 책만 그런 것인지, 130-31페이지, 그리고 134-35페이지가 인쇄가 되지 않은 백지이다. 한국이면 가서 바꿔달라고 할텐데 어쩔 수 없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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