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428

순례자 순례자는 속도 자체의 속도대로, 즉 시간이 흐르는 속도대로 시간 속을 통과한다….시간과 지형이 함께 꾸미는 음모를 순례자는 당해 낼 재간이 없다(길위에서 하나님을 만나다, 219) 길위에서 배운 것중의 하나는 거리만큼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늘 보는 것보다 더 멀어보이고, 더 높아보이고, 더 힘들어 보이는 산들은 딱 그만큼의 시간을 더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그 지형과 시간은 무릎꿇게 할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나를 놓아주고 비로소 쉼을 허락했다. (자세히 보면 점처럼 보이는 이들이 사람이다. 부은 발을 물에 담그고 여전히 익을 기색이 없는 버섯 리조토를 꾸역꾸역 먹으며 이것을 삼켜야만 저 고개를 넘을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다) 2023. 8. 6.
언제 다시 볼런지 JMT와 다른 코스로 갈라지는 junction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싸인판. 얼굴은 존 뮤어이다. 이제 20초만 걸으면 배낭을 내려놓고 완주를 마치려는 순간 들꽃이 활짝 피어 마치 나의 완주를 축하해주는 듯 하여 행복했다. 2023. 8. 6.
순간들 Road End's junction에 있던 다리. 아침에 혼자 건너는데 얼마나 흔들리던지.. 왜 한번에 한 사람인지 확실하게 각인시켜 준 곳. 혼자 맞이하는 계곡길, 개울을 건너며 만난 들꽃, 그리고 물이 떨어져 혼자 정수하고 있는데 조용히 나타나 풀을 뜯던 사슴들. 맑고 그윽한 사슴눈망울이란 것을 서로 지긋이 바라보며 확인하던 시간들. 얼핏 스쳐지나갈 순간들을 "와, 무섭다. 이럴 줄 몰랐어... 너무 좋구나, 아름다워... 너는 풀을 먹고 나는 물을 정수하고 있어"라고 혼잣말을 하며 되뇌일 때 그것이 나의 기억속에 오래 남는 경험들을 JMT에서 하곤 한다. 2023. 8. 6.
아름답고 즐거운 순간 패스 정상에 오른 김목수가 주섬주섬 뭘 찾는다. 하이킹 바지를 찾는데 보이지 않는단다. 아무래도 저아래에서 고소로 누워 있을때 말리려고 벗어놓은 바지가 날아가 모양이란다. 그러더니 한국의 재래시장에서 산 듯한 소위 몸빼바지를 입고(잠옷이란다) 갑자기 작살낚시에 대하여 신이 나서 얘기를 시작한다. 아는 이들은 알지만 김 목수는 정말로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3600미터의 산 정상에서 쏟아놓는 작살낚시와 활어회, 매운탕, K-bbq까지... 작가 김훈은[라면을 끓이며]에서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라고 했지만 비록 지금 입안에 없어도 그것을 이야기하고 웃을 수 있는 이런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어서 걸을 수 있고 배낭을 멜 수 있었다. 2023. 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