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에 다녀오려던 계획이 아내의 컨디션이 갑자기 나빠져 마지막에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예상치 않은 시간이 생겨 주일 저녁에 차분히 영화 한편을 보았다. "Perfect days"
주인공, 히로야마는 도쿄 공중 화장실의 청소부다. 그의 일상은 변화가 없다. 아침에 캔커피 하나를 마시며 출근하는 동안에는 오래된 70-80시대의 카세트 테이프 팝곳을 듣는다. 그는 정말로 성실하고 꼼꼼히 자기가 맡은 공중화장실들을 청소한다. 점심에는 가까운 신사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로 점심을 먹고 오래된 필름 올림퍼스 카메라로 나무 사진을 찍는다. 가끔 오래된 단풍 나무아래에 새롭게 자라는 어린 단풍 나무묘목을 고이 가져와 집에서 키운다. 일이 끝나면 공중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고 늘 가는 지하철역의 간이 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
그가 찍은 나무 사진들은 뷰 파인더로 찍을 수 있지만 그냥 대충 찍는다. 그리고 현상된 사진들 중 초점이 맞지 않거나 엉뚱한 사진들은 과감히 찢어 버린다. 오직 나무와 푸르른 잎들이 찍힌 사진들을 월별, 연도별로 보관한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사진처럼 우리의 일상도 별 것 없이 흘러가며 그 모든 일상의 순간들을 기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일상의 대부분은 그렇게 사진을 찢어버리듯이 보내 버려야 하고 오직 우리의 심상속에 오래 기억될 것들을 보관하기에도 짧은 날들임을 갈수록 깨닫는다.
그의 일상을 흔드는 것은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영화속의 여자들에 눈길이 간다. 같이 일하는 젊은 청년의 여자친구가 갑자기 이 중년의 주인공의 볼에 입맞춤을 한다던지, 늘 같은 신사의 옆자리 벤치에서 점심을 먹는, 아마도 복장으로 보아서는 은행같은 곳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의 불안하고 어두운 표정, 간혹 들르곤 하는 식당 여주인과의 대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조카인, 니코란 이름의 중학생 여자아이의 등장. 그 사람들은 각각 주인공, 히로야마의 얼굴에 웃음을, 기대를, 슬픔과 걱정을 안긴다.
사람들로 인하여 그의 완벽해 보이는 날들이 더 이상 완벽하지 않게 되지만 역설적으로 히로야마는 자신이 돌보아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웃음을 되찾는다. 여전히 다시 시작되는 하루이고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똑같은 탑을 보며 출근길을 서두르지만 그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졌고 편안해 보인다. 그러나 이어지는 알듯 모를듯한 울음과 기쁨의 얼굴의 교차.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완벽한 날들'은 어떤 날일까?
개인적으로는 만남과 관계속에서 'perfect day(s)'가 오기도 하고, 또 사라지는구나 싶은 단순하지만, 분명한 진리를 다시 깨닫게 하는 영화였다. 도쿄의 공중화장실이 이렇게 다양하고 아름답구나라는 것을 발견했고 이 영화가 빔 벤더스가 감독한 영화라니.
유일하게 본 그의 영화는 1987년 무렵엔가 본 '파리 텍사스'였는데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개봉 첫날 조조 50명에게 영화대본집을 준다고 해서 1시간 반을 덜덜떨며 기다려 받았던 기억은 선명하다. 다시 '파리 텍사스'의 줄거리를 찾아보니 여전히 처음 대하는 영화같지만 그래도 나스타샤 킨스키의 얼굴은 분명히 기억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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