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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이처럼 사소한 것들

by yosehiker 2025. 3. 11.

안식하는 월요일 한나절에 끝내기 적당한 분량이라 읽었다. 처음 시작부터 계속해서 드는 생각은 '이 책 뭐지?' 중간까지는 '스토너'와 중첩이 되었다. 인간의 삶, 아니 일상이란 어떤 것일까?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내일이 저물 때도 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 

딸들에 대한 기대와 걱정, 아내와의 소소한 사랑과 갈등, 일속에서 겪는 기쁨들, 걱정들. 나의 일상이나 주변의 일상들이 이것과 뭐 그리 다르겠나 싶으며 소설은 우리를 아일랜드 소도시로 데려간다. 

그의 삶은 풀리지 않는 근원적인 출생에 관한 질문과 수녀원이 서로 만나며 펄롱의 갈등을, 그의 신앙적 고민을 드러낸다.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분노의 포도]에서처럼 '젖'은 생명을 살리는 힘이다. 그것이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 살림이 되는지, 아님 그냥 버려져 절망이 되고 마는지, 작가는 펄롱의 고백을 통하여 생명과 위선사이, 그리스도와 바리새인사이에서 위선과 가식의 모습을 왔다갔다 하곤 한다. 

펄롱이 뒤로 물러서며 미시즈 케호를 마주 보았다. "그 사람들이 갖는 힘은 딱 우리가 주는 만큼 아닌가요?"

펄롱은 스스로에게도 이 말을 힘주어 했던 거 같다. 그리고 자신의 위선을 깨고나와 용기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이어지는 이발관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그렇게 마음 먹는다. 

소설의 주무대는 아일랜드이다. 대대로 아일랜드 영성에는 '얇은 막'(thin place)이 이 땅에 존재하는데 그 곳은 하늘과 땅이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더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있다고 전해져 온다. 수녀원, 성당, 미사, 목회자, 고백.. 모두 thin place의 역할을 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이 갖는 힘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실제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것에 신뢰를 두는 사람들의 믿음때문이다. 탈진리(post-truth)는 고사하고 탈진실(post-fact)이 난무하는, 그리고 그 한복판에 소위 '목사'라는 이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사람들로 부터 온다는 것을 깡그리 망각한채로 마치 자기 자신의 능력인 양 설쳐대는 것은 이젠 마치 호러영화와 SF영화가 합쳐진 듯이 비현실적이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한 손에는 아이를, 다른 손에는 아내를 위한 구두 상자를 든 펄롱은 우리의 모습이다. 여전히 두렵고 근심되는 현실속에서도 일상의 기대와 기쁨으로, 감사로, 또 한편으로는 진실과 용기로 살아가는 것. 그것밖에는 다른 길은 없다. 

'아무려면 어떤가 모든 것이 은혜이니'라는 [어느 시골신부의 일기]의 글귀를 펄롱은 "나날의 은총"이라고 했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잠시 멈춰서 생각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떠돌게 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엉켜있는 마음과 인생, 세상사를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소설속 배로강의 깊고 검은, 흑맥주와 같은 강물이 어느덧 바다에 다다르듯 우리의 인생도, 신앙도, 이 혼돈스러운 세상도 그처럼 잔잔히 다다라야 할 곳에 도착하지 않을까, 그래서 모두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펄롱처럼 하루의 고단한 일을 마치고 아내, 아이린과 마주앉아 하루의 일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절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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